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빅토리아 여왕 (문단 편집) === 남편과의 순애보 === 남편 앨버트 공과의 사랑이 널리 알려져 있다. 빅토리아가 발랄한 성격이었던 반면 앨버트는 과묵한 편으로 성격 차이가 컸지만 둘 사이의 유대감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했다고 한다. 둘 사이의 금슬은 무척 각별해 20년 간의 결혼 생활 동안 무려 9명의 자녀를 낳았다. 결혼 기간의 반은 [[임신]] 기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빅토리아는 [[앨버트 공]]의 머리카락이 담긴 장신구를 달고 다녔는데 이게 유행이 되어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로켓(장신구)|머리카락을 담은 장신구]]를 다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앨버트 공이 [[장티푸스]]로 죽은 뒤[* 아들 [[에드워드 7세]] 때문에 공이 42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는 설도 있다. 나이 20살이 되도록 주색잡기에 빠져 살던 큰아들 에드워드가 여왕과 다툰 후 가출하듯 별장으로 떠나고 앨버트 공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무리하게 따라나섰다가 비를 맞아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왕은 큰아들 에드워드를 죽는 순간까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빅토리아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동안 남편을 기리는 의미로 매일 고인의 옷을 펼쳐놓고 [[카를 5세|언제나 검은 옷만을 입었다.]] 이 때문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하얀 레이스를 얹은 모습이 빅토리아 여왕의 특징처럼 굳어진다. 뿐만 아니라 여왕은 [[윈저 성]]에서 [[앨버트 공]]이 임종을 맞은 침실을 그대로 보존했으며 잠자리에 들 때도 앨버트 공이 생전에 입던 옷 등 유품을 곁에 놓았다고 한다. 남편 앨버트 공의 죽음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는 두 사람이 결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1세]][* 빅토리아에겐 외가 쪽으로, 앨버트 공에겐 친가 쪽으로 숙부가 되는 인물. 빅토리아의 사촌언니가 되는 [[조지 4세]]의 딸 [[샬럿 어거스타|샬럿 공주]]의 남편이기도 하다.]에게 쓴 편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의 행복은 끝났습니다. 제게 이 세상은 없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앨버트 공은 빅토리아 여왕을 번쩍 들어서 집무실에서 침실로, 침실에서 집무실로 데려다 주었다는데 아무리 앨버트 공이 건장한 남자였다고 해도 이건 분명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앨버트 공 사후 존 브라운이라는 하인이 이 역할을 대신했는데, [[https://en.wikipedia.org/wiki/John_Brown_%28servant%29?wprov=sfla1|존 브라운]]이 앨버트 공의 외모를 닮기도 해서 잠깐 동안 스캔들이 퍼지기도 했다.[*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의 관 안에 존 브라운의 사진을 넣었고, 그녀의 손에 브라운 어머니의 반지를 끼웠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는 앨버트 공을 잃었을 때만큼 고통스럽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둘이 부부싸움을 하고는 앨버트 공이 너무 화가 나 방에 틀어박혔다. 빅토리아 여왕이 화해할 목적으로 노크를 하자 앨버트 공이 누구냐고 물었고,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의 여왕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번째로 노크를 하고 ''''빅토리아 입니다''''라고 대답해도 앨버트 공은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세번째로 여왕이 노크를 하고 ''''당신의 아내예요''''라고 대답하자 기쁘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 문서에도 나와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 장례식이 연상되기도 하는 부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